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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과 새 언약의 피 뿌림이 가지는 의미

1. 옛 언약의 피 뿌림(출 24:6~8) 이것은 역사적으로 B.C. 1400년경에 아라비아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행위 율법 언약 때에 제단과 백성에게 뿌려진 번제와 화목제 희생짐승의 피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보편적 율법의 완전한 행위를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이 피는 시내산 언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생명을 상징하는데, 양 당사자가 언약을 각자의 생명으로 보증한다는 의미로 뿌려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편에서는 언약의 모든 내용을 항상 지킬 것이며 지키지 못할 때는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을 지키는 모든 백성에게 약속된 복을 반드시 내려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옛 언약의 보편적 도덕법을 모두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 진노에서 합법적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 단번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Shorts1   📺   2. 새 언약의 피 뿌림(마 26:27~28) 이것은 A.D. 33년경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형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입니다.  이 피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속하시는 피가 되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 뿌려져서(히 9:11~12; 12:24),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죄사함을 베풀어서, 사람과 화해를 이루게 하시는 피입니다. 그리고 이 피는 그 효력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서(히 10:22 벧전 1:2), 하나님의 영원한 속죄를 선언해 주며, 법적이고 실제적으로 죄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거듭남을 이루어 주고, 성령의 영원한 내주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두 언약에서 뿌려진 피의 공통점은 그 피...

은혜와 권능(행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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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6:8) 1. 은혜 이때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충만한 믿음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성품의 대표적 특성으로서의 '은혜' 를 말합니다. 2. 권능 이때의 권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충만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담대한 믿음과 그로 인한 '표적과 기사의 권능' 을 말합니다. 은혜가 앞서고 권능이 뒤따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그러해야 더 복 되고 안전합니다.  YouTube   📺      Shorts   📺

로마서 4장 5절에 나타난 두 가지 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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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4:5) 롬 4:5에는 두 가지 칭의가 나오는데요. 먼저는 '의롭다 하시는' (롬4:5a, 헬-현재분사)이고 둘째는 '의로 여기시나니' (롬4:5b, 헬-명사)입니다. 이 두 가지 칭의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믿기 이전에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선험적 칭의 첫째 칭의는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아들의 대속을 근거로 먼저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믿기 이전의>  '일방적인 칭의' (롬4:5a)입니다. 이 '일방적인 칭의'는 내가 경험하기 이전의 '칭의'이므로 '선험적 칭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Shorts1   📺 2.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경험적 칭의인 '이신칭의' 둘째 칭의는 그 '선험적 칭의'를 들은 사람이 그 칭의를 '믿을 때' 그 믿음을 선험적 칭의를 받기에 합당한 자세 곧 사람 편에서 갖추어야 할 의(올바름)로 여기셔서 그 '선험적 칭의'를 내 마음에 영원한 칭의로 인쳐주시는 <믿음에 의한> '칭의'(롬 4:5b)인 '이신칭의' 입니다. 이 '칭의'는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여 경험한 칭의이므로 '경험적 칭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선한 일을 행한 적이 없고 경건하지도 않은 모든 인류를 향해 하나님께서 아들의 대속을 근거로 먼저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칭해 주실 때 하나님의 그 일방적이고 값 없는 칭의 선언을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단번에 받아들임으로 그 믿는 마음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칭의를 영원히 인쳐주셔서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얻게 됩니다. YouTube   📺      Shorts2   📺

말씀을 받아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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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복음 을 전할 때 이미 복음 의 내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씀을 새로 받아서 증거할 수 있도록 에베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엡 6:19) 바울이 이 기도요청을 할 때는 이미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와 같은 복음의 진수가 담긴 서신서를 쓴 이후였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한량 없이 주시는 성령을 통해 때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요 3:34 8:28 12:49,50 14:10,24 17:8) 즉 이미 아는 내용일지라도 그때마다 성령께 새로 받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성경적인 증거의 방법입니다. Shorts1   📺 그런데 이렇게 때에 맞는 말씀이나 말씀에 합하는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성령을 통해 개인적으로 받는 신앙을 직통계시를 받는 것이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인하는 광범위한 주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없는 올바른 지식을 사전 계획대로 잘 진술하는 것을 좋은 설교요 전도라고 믿는 성령을 소멸하는 교리를 추종합니다. 이런 식의 설교와 전도는 현장에서 필요한 말씀을 성령께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전달하지 못하므로 생명과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 대신 빵을 주는 엉뚱한 조치로 인해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YouTube   📺      Shorts2   📺

이신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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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때 그 마음의 상태가 믿지 않고 율법을 잘 행할 때보다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고 더 경건합니다. 또한 그 자신의 속사람도 복됩니다. 삶 역시 믿음을 따라 살 때가 율법을 따라 살 때보다 더 경건하고 복됩니다. 즉 믿을 때 믿는 사람의 마음과 그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을 이미 단번에 받았다는 점에서 법적이고 본질적으로 의롭고 현재 믿음의 분량을 따라 실천적으로 의롭습니다. Shorts1   📺 처음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그 마음의 태도와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실제로 의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피조물에게 합당한 겸손과 가난 가운데 있다는 것이며 마음 중심에 말씀을 받아 아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나의 참여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의 일이요 마음의 변화된 태도요 상태입니다. Shorts2   📺 믿음은 하나님의 믿어지지 않는 말씀에 대해 내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며  즉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속죄를 받고 거룩해질 수 있고 하나님께 연합할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용서를 받고 마음이 깨끗해지고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그 믿는 마음의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실제로 의롭기 때문이고 믿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실제로 의롭기 때문입니다. YouTube   📺      Shorts3   📺

그리스도로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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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핵심은 영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함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거하심입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 그리스도로 충만 그리스도의 임재로 충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충만 그리스도의 지혜와 권능으로 충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 영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을 핵심적으로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표현 대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분리해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특히나 머리에 머무는 자연인 수준의 성경 이해와 기억을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것으로 생각하는 널리 퍼진 경향성 때문입니다. Shorts1   📺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 대신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을 분리해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 없는 영을 성령이라고 생각하는 널리 퍼진 경향성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하기를 영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것으로 충만하기를 YouTube   📺      Shorts2   📺 '그리스도로 충만'이라는 표현을 선호하게 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구원의 경험과 신앙생활의 경험을 돌아볼 때 '말씀으로 충만', '성령으로 충만'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고 그분으로 우리 마음이 충만했던 것이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했고 인격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했고 영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했고 기쁨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순위이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보혜사를 약속하시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

믿음의 진실성을 분별하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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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나라가 기독교화 되어 기독교적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이 정신문화와 예절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에 드러난 신앙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흉내내며 스스로까지 속고 있는 생명 없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의 진실성을 분별하는 객관적 기준 으로 삶의 보여지는 모습보다는 믿음에 합당한 초자연적인 능력 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고전 4:20). 초자연적 능력이란 인격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적 변화의 영향력을 주는 능력으로서의 성령의 열매 가 있고(갈 5:22,23; 롬 14:17), 외적으로는 고백하고 기도한데로 성취되는 능력으로서의 은사적 믿음의 열매 가 있습니다(마 8:13; 9:29). 믿었다면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히 11:1). Shorts1   📺 성령의 열매의 일순위인 처음 세 가지는 분명히 내적이고 정서적인 것 으로서  복음 에 대한 믿음에 의해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과 또한 거기서 나오는  '기쁨' 과 '평강' 이 있습니다(롬 5:5 갈 5:22).  그러므로 영적 감정 을 무시하는 사람을 의심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생명이 없음을 감추려고 감정을 숨기는 거짓 성도가 있고 자기 속의 회개할 죄를 감추려고 감정을 숨기는 육신적인 성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숨기고 있는 상태 역시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보입니다(잠 27:19). YouTube   📺      Shorts2   📺

믿음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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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으니 순종하자'가 아니고 믿으면 순종합니다(요 6:29). 믿음만큼 순종합니다(마 17:20a). 믿으면서 불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요일 3:6). 믿음과 순종 사이에는 아무 것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YouTube   📺      Shorts   📺

로마서 7장, 뛰는 죄 위에 나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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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은 죄가 율법을 통해 사람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자만심을 불어넣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분투하게 만들므로 숨어있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어서 그 사람이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게 만들었습니다(롬7:11). 죄의 이런 속임은 사람에게는 율법과 정죄를 통한 사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지만 넓게 보면 사람에게 죄의 심각성 (롬7:13)과 율법의 거룩함 (롬7:12)과 사람의 무력함 (롬7:24)을 깨닫게 하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결국 구원자를 찾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롬7:25). 하나님께서는 죄의 이런 속이고 죽이는 역사까지도 통제하시고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십니다. YouTube   📺      Shorts   📺

용서하심과 용서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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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미 용서하심 -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창세 전에 - 역사적으로는 2000년 전에 2. 용서받음 - 이미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용서를 - 단번에 믿음으로 받음 복음 에는 죄의 저주스러움을 계시하는 것과 은혜의 놀라움을 계시하는 두 부분이 있기 때문에 믿음에도 죄의 저주스러움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과 은혜의 놀라움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이미 정하신 용서를  믿음을 통한 전인격의  자발적인 참여 를 통해 받게 하셨다는 사실이 구원의 관계적 특성 을 잘 드러내줍니다. YouTube   📺      Shorts   📺

성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세 가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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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발적인 진정한 낮아짐 2. 정죄와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3. 죄의 법과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인격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도 '단번에 깨달은 영원한 속죄' 의 교리(히 10:10,14)에 근거해서 정죄를 이긴다고 말합니다.  특히 구체적으로 죄를 범한 이후에도 찔림을 받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다시 십자가의 속죄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요일1:7,9) 이미 깨달은 영원한 속죄의 교리에 근거해서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Shorts1   📺 그들은 영원한 속죄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깨달았을지는 몰라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깨달음과 믿음에는 성령의 역사와 인격적인 만남이 빠져 있기에 그것들로는 참된 평안과 죄를 이기는 능력과 진정한 겸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속죄 교리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교제를 단절시키고 양심을 마비시켜서 사람을 그럴듯한 교리를 가진 괴물로 만듭니다. Shorts2   📺 성경적인 영원한 속죄의 교리를 믿으면 구원의 안전에 대한 확신 을 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진실한 회개 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참된 평안 과 죄를 이기는 능력 과 진정한 겸손 을 줍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의 교리를 믿는 참된 표징 입니다. YouTube   📺      Shorts3   📺

두 가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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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받아들인 지식은 그 내용과 수준 만큼 영적인 감정과 자발적  의지 를 발동시킵니다.  믿음에 그러한 감정과 의지가 발동되지 않는다면 그가 믿은 지식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받은 신령한 지식 이 아닌 문자적 수준 에 그친 지식입니다. 정확한 성경적인 내용일지라도 문자적 수준에 그친 지식과 믿음과 증언에는 아무런 영적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한 지식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없어서 그 내용이 복음일지라도 죽이는 율법으로 기능합니다. Shorts1   📺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부터 영적인 감정과 의지를 분리시키고 문자적 차원에 그친 이해와 영접을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교리는 사람을 점점 강시, 좀비, 로봇으로 만듭니다. 그런 문자적인 차원에 그친 믿음을 구원 얻지 못하는 믿음,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이런 죽은 믿음에 기초해서 가지고 있으면서 성도다운 삶도 역시 신령한 믿음이 주는 능력이 아닌 자기의 의지로 수행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믿는 것도 행하는 것도 모두 땅에 속한  자연인의 수준 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YouTube   📺      Shorts2   📺

술 취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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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괴로울 때 기쁨이 메마를 때 잔치 때 마음에 기쁨과 힘과 생기와 활력을 얻기 위해 취하도록 마십니다. 그러면 흥겨운 시와 찬송과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살다가 우울해질 때 사역에 권태가 올 때 하나님을 기념할 때 특별히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3)

교리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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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교리의 본체 교리의 실상 교리의 목적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없는 교리에 대한 지식은 문자적 수준의 죽은 지식 이런 교리에 따른 행위는 인위적인 육신의 행위 YouTube   📺      Shorts   📺

성도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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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적 관점 - 새 신분의 사람 본질적 관점 - 새 본성의 사람 인격적 관점 - 새 관계의 사람 실천적 관점 - 새 생활의 사람 참 신자가 믿음으로 행할 때 반드시 지정의 차원의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만 역으로 영적인 경험을 한다고 하여 모두가 참 신자는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거듭나지 않아도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Shorts1   📺 영적 경험을 하는 생명 없는 명목상의 신자 1.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요 15:1~3) 2. 왕의 예복(믿음, 그리스도, 새 사람)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마 22:8~14) 3.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마 25:1~13) YouTube   📺      Shorts2   📺

믿음과 율법과 성령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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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복음 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라간다는 것이고 이 성령님의 길은 율법을 이루는 사랑의 길입니다. YouTube   📺      Shorts   📺

믿음과 행위, 믿음과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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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는 반드시 믿음의 내용과 분량 만큼의 행위가 따르며 이때의 행위는 육신의 힘으로 행하는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믿음에는 반드시 믿음의 내용과 분량 만큼의 감정이 따르며 이때의 감정은 육신에 속한 감정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영적인 감정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으며 믿음과 감정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Shorts1   📺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키거나 믿음과 감정을 분리시키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지정의가 질서있게 통합된 유기적 존재로 창조해주신 사람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가르침이고 그래서 실현될 수 없는 가르침이자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가르침입니다. YouTube   📺      Shorts2   📺

세 가지 믿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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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변의 신분을 얻는 최초의 단회적 믿음과 전인적 성화를 이루는 진행적 믿음은 하나입니다. 한 믿음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라가는 과정을  다르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한번 심기면 뽑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상태는 나빠질 수 있지만 구원을 잃어 버리도록 사라지거나 뽑히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해주시기 때문이고 (눅 22:32) 주님과 아버지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 10:28, 29) 그래서 성도의 신분도, 특권도 변하지 않습니다. Shorts1   📺 그리고 이 믿음은 인격적입니다. 이 믿음의 수준만큼 하나님과의 교제의 친밀함과 성화의 생명을 누립니다. (엡 3:17~19) 그러나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는 은사적 믿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요 10:41) 구할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라고 명령을 받을 때가 있고 (마 10:8) 초자연적 믿음이 작다고 책망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마 17:17) YouTube   📺      Shorts2   📺

세 가지 차원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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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없다는 고백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이지만 (엡 4:5) 그 믿음에는 최소한 세 가지 차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변의 신분을 획득하는 단회적 믿음 (유 1:3) 전인적 성화를 이루는 진행적 믿음 (엡 3:17) 초자연적 사역을 위한 은사적 믿음 (요 14:12) YouTube   📺      Shorts   📺

십자가의 도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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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도 안에서 영원한 속죄를 받았고 영원한 속죄를 확신합니다. 십자가의 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함께 죄에 대해 죽었고 함께 하나님께 대해 살아났습니다. 십자가의 도 안에서 모든 성도와 연합되었고 성령께서 임하셨고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 안에서 부활 생명으로 살며 하나님의 충만을 받으며 아들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십자가의 도 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 안에서 오늘도 성령을 주시며 능력을 행하십니다. (갈 3:5)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십자가의 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오직 거듭난 의인은 영원히 십자가의 도 를 믿음으로 삽니다. (롬 1:17) 십자가의 도 는 부활의 생명을 내는 유일한 샘입니다. YouTube   📺      Shorts   📺

자존심과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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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높아진 마음을 자존심이라고 부르고 주님의 긍휼을 입은 마음을 자존감이라고 부른다면 십자가의 복음 으로 자존심을 가진 나는 죽고 자존감은 충만한 삶을 살겠습니다. YouTube   📺      Shorts   📺

사도 바울의 자기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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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 (렘브란트) 불신자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임을 알았습니다. (딤전 1:15) 성도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임을 알았습니다. (엡 3:8) 일꾼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가장 작은, 자격도 없는 자 임을 알았습니다. (고전 15:9) 성도는 은혜로만 옷을 입은, 자기 행위로 꾸민 것이 하나도 없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YouTube   📺      Shorts   📺

주님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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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양은 나를 안다(요10:14) 내 양은 나를 믿는다(요10:26)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요10:27) 내 양은 나를 따른다(요10:27) 내 양을 빼앗지 못한다(요10:28,29) "나를 안다,  나를 믿는다,  내 음성을 듣는다,  나를 따른다" 는 말씀이 좋습니다. 나는 주님을 앎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안전하지요. YouTube   📺      Shor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