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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과 새 언약의 피 뿌림이 가지는 의미

1. 옛 언약의 피 뿌림(출 24:6~8) 이것은 역사적으로 B.C. 1400년경에 아라비아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행위 율법 언약 때에 제단과 백성에게 뿌려진 번제와 화목제 희생짐승의 피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보편적 율법의 완전한 행위를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이 피는 시내산 언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생명을 상징하는데, 양 당사자가 언약을 각자의 생명으로 보증한다는 의미로 뿌려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편에서는 언약의 모든 내용을 항상 지킬 것이며 지키지 못할 때는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을 지키는 모든 백성에게 약속된 복을 반드시 내려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옛 언약의 보편적 도덕법을 모두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 진노에서 합법적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 단번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Shorts1   📺   2. 새 언약의 피 뿌림(마 26:27~28) 이것은 A.D. 33년경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형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입니다.  이 피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속하시는 피가 되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 뿌려져서(히 9:11~12; 12:24),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죄사함을 베풀어서, 사람과 화해를 이루게 하시는 피입니다. 그리고 이 피는 그 효력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서(히 10:22 벧전 1:2), 하나님의 영원한 속죄를 선언해 주며, 법적이고 실제적으로 죄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거듭남을 이루어 주고, 성령의 영원한 내주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두 언약에서 뿌려진 피의 공통점은 그 피...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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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영으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믿고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1:12). 이때 예수님께서 증언해 주시는 핵심적인 말씀은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 받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참되게 깨달아 믿은 사람은 그 속사람인 영혼이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가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으로 거듭난 이후에도 이 땅에서는 여전히 '근원적인 죄가 거하는 죽을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롬 6:12). 즉 믿기 이전에 죄의 종으로 살았던 영혼 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제는 하늘과 땅에 속한 두 본성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성도의 참된 정체성은 장차 완전한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거듭난 새 생명의 새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역시 자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질 때에만 이 땅에서 충만한 천국의 성품과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러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처럼 항상 순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위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굳세게 믿는 것입니다(갈 3:5). YouTube   📺

건강한 신앙이 가진 모순되는 두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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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교적인 신앙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의 활동을 허용하고 계시고(히 2:14), 죄의 몸이 믿음의 영역 밖에서는 여전히 지배력을 가지고 활동하는 현세에서(롬 6:6) 신앙은 근본적으로 순교적입니다. 2. 행복한 신앙 한편 신앙은 천상적인 충만한 기쁨과 평강의 길이며 영육간에 복된 길입니다(마 11:28~30; 19:29). 3. 결론 그러나 행복한 신앙의 길은 자동으로 가지지 않습니다. 주님과 같이 때마다 고민 속에서 하나님 앞에 현재의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을 확정하는 씨름을 거친 후에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마 16:24) 겉사람의 낡아짐 속에서도 영육간에 충만한 복을 누리며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YouTube   📺      Shorts   📺  

십자가로 마귀를 정복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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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으로 허용받은 세상에 대한 불법적 통치권과 몸을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눅 4:6 히 2:14) 온 세상과 자신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도록 공격하는 마귀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심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하셨습니다(골 2:15). 이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믿는 성도 역시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점에서 마귀에 대해 이미 승리하였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금 승리하고 있으며 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 특별히 믿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또한 마귀에게 그 발꿈치를 상하셨습니다(창 3:15). 마귀는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으며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천년간 무저갱에 갇혔다가 그 후에는 둘째 사망의 영원한 불못에 던져져 완전하게 멸망할 것입니다(계 20:1~10). YouTube   📺      Shorts   📺  

로마서로 보는 성도와 율법의 주종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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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성인인 성도는 초등교사인 율법 아래 있지 않으므로 그 다스림과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그러하고 믿음의 분량을 따라 경험적으로 그러합니다(롬 6:14). 성도가 율법 아래서 율법의 음성을 듣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안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롬 8:13~15). 그리고 그가 아무리 성도가 되었더라도 율법 아래서는 항상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롬 3:9). 그러나 성도가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 대한 순전한 믿음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에는 거꾸로 그 율법이 성도의 종이 되어 주인인 성도에게 정죄함 없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고 성도는 그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행함으로 믿기 전에는 항상 실패했던 율법을 이루는 천상적 수준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롬 3:31). Shorts1   📺 그러나 성도가 믿음 안에서 성령을 따라 자책이나 책망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조차 율법의 행위를 기준으로 비추어서 본다면 모든 죄의 근원인 원죄가 있는 연약한 육신 가운데 살고 있는 현세에서는 항상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롬 3:20; 4:14~16). 그러므로 성도가 다시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지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가 현재 아무리 경건한 성도일지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에 미달된 죄인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믿음과 성령이 아닌 율법과 자기 힘으로 자기 힘으로 사는 옛 사람의 수준으로 하락하게 되었으므로 내적으로 계속 죄에게 필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그만큼 더 큰 율법의 정죄와 그로 인한 사망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롬 7:24). YouTube   📺      Shorts2   📺

감정과 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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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본심입니다. 나쁜 감정이 일어날 때 본심을 억제하는 것은 차선입니다. 본심을 숨기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항상 '복음을 믿어' 영적 감정으로 바꾸는 것이 최선입니다. (갈 3:5; 5:22 시 51:12) 기쁨을 예로 들 경우 죄에도 최고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도 최고의 기쁨이 있습니다. (히 11:25 살전 5:16) 죄의 기쁨은 현세에 한정되고 징계와 형벌이 있으며  복음의 기쁨은 현세와 내세에서 계속되고 경건의 힘이 되어 상을 받게 합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느 8:10) YouTube   📺      Shorts   📺 ※ 물론 이때의 감정은 생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이상에 의한 병적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기본적인 분별력과 자유의지가 잘 작동하는 상태에서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본능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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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가지 본능 1) 생리적 본능 음식, 성, 안전 등 몸의 필요와 관련된 선천적 본능 2) 사회적 본능 ▶ 사회성의 원천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하는 본능 ▶ 관계 안에서 잉태되고 조성되고 출생하고 양육되고 자라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형성되는 후천적 본능 ▶ 모성애, 가족애, 우정, 확장된 가족애로서의 공동체 의식 등이 있으며 흔히 말하는 눈치, 건전한 체면차림이나 책임감 등도 이 사회적 본능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생리적 본능도 어느 정도는 인위적 교육에 의해 사회적 본능에 가까운 습관의 수준으로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지만 사회적 본능은 그런 교육의 힘 보다 훨씬 강하며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수동적 경험에 의해 형성됩니다. Shorts1   📺 2. 두 가지 본능과 신앙의 관계 생리적 본능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식욕을 예로 들 경우 죄가 되는 식탐에 빠질 수 있듯이 사회적 본능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예절을 예로 들 경우 죄가 되는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이 두 가지 본능에 의해 살아갑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본능이 성령의 소욕과 인도를 따라 나타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은 이 두 가지 본능이 일상적으로 성령의 소욕과 인도를 따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참고 - 고전 10:31 골 3:17). 이 두 가지 본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잘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과 모든 계명은 이 자연적인 두 가지 본능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며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에만 가장 복되게 나타나게 됩니다.   YouTube   📺      Shorts2   📺 ※  여기서 '선천적' 은 '출생할 때 가지고 나오는'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후천적' 은 '출생한 이...

성도에게 해당하는 여러 가지 사망(로마서 6~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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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여기서 다루는 사망에는 성도와 자연인 모두에게 임하는 첫째 사망인 '몸과 영혼의 분리로서의 사망'은 포함하지 않았고, 또한 영원한 속죄를 받지 못한 자연인에게만 임하는 둘째 사망인 '지옥의 형벌로서의 사망'은 당연히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2. 긍정적인 사망 처음 복음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혜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망으로서 '옛 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영혼이 죄와 율법과 육신과 세상으로 부터 법적이고 실제적으로 분리되는 해방을 의미하며 그래서 옛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음이지만 새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활이고 거듭남이고 새 창조입니다. Shorts1   📺   3. 부정적인 사망 성화 과정에서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함으로 인해 받는 하나님의 저주로서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1) 현세에서 받는 사망 ➤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므로 몸과 영혼에 임하는 전인적인 징계의 사망이 있습니다. ➤ 복음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 아닌 율법과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 받게 되는 율법의 정죄에 의한 마음의 고통과 수치의 사망이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에서 오는 영혼의 목마름과 공허의 사망이 있습니다(참고-요 4:15). 2) 내세에서 받는 사망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끝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받을 수 있는 불을 통과하는 것 같은 고통의 사망이 있습니다(참고-고전 3:15). YouTube   📺      Shorts2   📺   

지식, 믿음, 행복,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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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믿음과 행복과 경건은 분리되지 않는 유기적인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 대한 지식을 믿는 만큼 행복하고 경건합니다. YouTube   📺      Shorts   📺  

성도가 받을 심판과 힘쓸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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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단번에 믿어 영원한 속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영원한 속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순전함 가운데 자라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번에 얻은 영원한 속죄에 대한 구원 얻는 수준의 믿음과(롬 1:17 벧후 1:1 유 1:3) 그 믿음을 보시고 차별 없이 베푸시는 의인과 자녀로서의 신분과 새 본성과 새 생명은 성령님의 주도적인 도우심에 의해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성도는 지옥에 가는 심판을 받지는 않으며 오직 이생에서 그 믿음이 성장한 수준과 그 믿음에서 나온 사랑으로 섬긴 분량을 따라 현세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몸과 영혼을 위한 복과 더 많은 상을 받거나 또는 징계나 더 적은 상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YouTube   📺      Shorts   📺  

성도의 사십 일 금식이 비성경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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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사십 일 금식이 명확하게 나온 곳은 제가 보기에 세 곳인데 모세가 시내산에 두 번째로 율법을 받으러 올라 갔을 때 먹을 것 뿐만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는 완전한 금식을 했다는 것과  엘리야가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호렙(시내)산까지 사십 일을 걸어갔다는 것과 주님께서 요단강 침례 후 광야에서 사십 일을 주리신 경우입니다. 이때는 물까지 마시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세 곳이나 사십 일 금식이 나오는데도 그것을 성도에게 적용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Shorts1   📺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금식한 경우로 보이고 자연적 원리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 주님의 금식은 메시야로서의 자기 입증을 위한 시험의 과정에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십 일 금식은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은 손쉬운 금식이 아니고 또한 자신을 메시야로 입증하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위의 세 가지 경우는 그런 금식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십 일 금식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간혹 듣는 사십 일을 금식했다는 분들의 말이 혹시 사실일지라도 과연 그 열매가 성경적일지 신중하게 의심할 것 같습니다. YouTube   📺      Shorts2   📺

성도의 두려움(경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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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사 11:2~3) 성도가 가져야 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이 두려움은 율법 아래서 가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 아래서 가지는 두려움입니다. 이상하지만 경험하는 사람은 인정하듯이 이 두려움의 열매는 신령한 기쁨, 가장 큰 기쁨과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두려움이기에  ➤ (주님께는 없지만)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 를 죽음보다 두려워하고 ➤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 끊어지는 것을 더욱 그러하고 ➤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 을 더욱 그러합니다. 이 두려움은 참된 지식과 지혜의 기초입니다(잠 1:7; 9:10). 이 두려움의 정상이 믿음의 정상입니다(창 22:12). 이 두려움은 예수님의 행복의 근원이었습니다(사 11:3). 이 복된 두려움의 충만을 구합니다. YouTube   📺      Shorts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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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1. 모든 열매의 근원이자 총합 - 사랑 2. 자신과 관련한 내적 열매 - 희락, 화평 3. 이웃과 관련한 실천적 열매 - 오래 참음, 자비, 양선(선량) 4. 하나님과 관련한 태도의 열매 - 충성, 온유, 절제 모든 열매는 질서를 따라 유기적인 ‘하나’(단수)를 이루고 있고 각각이 모두를 위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구분지을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강조점을 따라 이상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Shorts1   📺 여기서 첫번째 열매인 사랑은 행함 이전의 열매로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롬 5:5).  이어지는 나머지 열매는 그 사랑이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내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내 영혼에 희락과 화평을 가져다 주고  그 힘으로 이웃을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선량함으로 대하게 하되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태도 가운데 그렇게 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열매는 동시에 맺히는 것이지만 그 성장의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는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사랑의 기쁨이 없이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 절제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자의적 극기일 것입니다.  YouTube   📺      Shorts2   📺

믿음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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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항상 역동적으로 변합니다. 거시적으로는 그 수준에 있어서 성장해가고 미시적으로는 그 크기가 등락을 반복합니다.  믿음의 수준이 성장한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인 말씀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결과인 성령의 열매와 사역의 능력이 성장해간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크기가 변한다는 것은 이미 믿고 있는 말씀에 대한 믿는 순전함의 정도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은 그 수준이 항상 성장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퇴보하기도 하며 정체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체되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무생물적인 정체가 아니라 믿는 마음과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 사이의 힘의 균형에 의한 정체이므로 역동적인 정체입니다. Shorts1   📺 그리고 믿음의 이런 역동적인 특성은 무엇보다도 구원 얻는 믿음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이 그 수준에 있어서 성장할 뿐만 아니라 퇴보할 수 있고 그 크기에 있어서 커질 뿐만 아니라 작아질 수 있다고 할 때 그 퇴보와 작아짐은 그가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성도라면 구원을 잃을 정도까지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사실 믿음의 역동성에 대한 이상의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 중에 하나로서 기본적인 지식에 속하지만 의외로 믿음을 고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 방식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경에는 다른 사람의 믿음의 수준과 크기를 평가할 수 있는 명확한 말씀들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몇 가지 사항에 제한되며 각 사람의 믿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YouTube   📺      Shorts2   📺

로마서를 통해 보는 사도 바울의 영적 변화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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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에 의한 구원(롬 3:21~30)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먼 후 다메섹으로 이끌려가서 회개하고 아나니아의 전도와 안수를 통해 그 은혜를 믿어 죄 사함의 확신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며칠 동안 다메섹의 제자들과 교제합니다.(행 9:1~19 갈 1:13~16) 2. 이신칭의 교리의 확립(롬 4:1~5:11) 이후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가서 성령의 조명과 계시를 받아 구약성경 전체를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다시 검토하고 그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립합니다.(갈 1:17a) Shorts1   📺 3. 다메섹과 예루살렘 전도 죄 사함의 확신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전도하여 제자들을 얻은 후, 구원 받은지 3년이 되어갈 즘에 다메섹에서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여 바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를 가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에서도 열정적으로 전도하다가 또다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형제들에 의해 고향인 다소로 보내집니다.(행 9:20~31 갈 1:17b~24) Shorts2   📺 4. 신앙의 갈등기(롬 7:14~24) 다소로 돌아가서 대략 7~8년을 지내는 동안 처음에는 전과 같은 마음과 열정으로 전도하는 생활을 했지만, 그가 가진 구원의 원리가 이신칭의였던 것에 반해 경건과 사역의 원리는 여전히 율법과 자기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 내면에서 반복적으로 죄에게 패배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점점 더 강한 정죄를 받아, 결국 경건과 사역 모두에서 능력을 잃고 그 마음이 지속적으로 사망의 고통 가운데 거하면서, 성령의 불같은 내적인 역사가 소멸하고 사람 편에서 붙드는 구원의 확신이 약해지고 흔들리는 가운데, 자신의 섬기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절감합니다. Shorts3   📺 5. 신앙의 전환기(롬 6, 8, 12~15장) 갈등의 극한에서 마침내 십자가 대속의 복음 안에 있는 새 창조의 사역이 가져다 준 새 사람으로서의 참된 ...

믿음을 믿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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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 기간 중 몇 년 동안 믿음을 믿지 못한 적이 있었죠. 왜냐하면 주변에서 말하는 믿음이 능력이 없는 이론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경험한 믿음은 변화시키고 삶에 활력을 주는 믿음이었는데 어떻게 이 사람들의 믿음은 그런 능력이 없이  단지 영원한 속죄를 받았다는 이상한 안심만으로 (겉으로나마) 만족해 할 수 있는지 이상했죠. 분명히 믿음에 대한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능력이 없을 수 있지 하며 그런 믿음에 오염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두려워했습니다. Shorts1   📺 말은 맞는데 능력은 없는 이상한 믿음 그리고 내리게 된 결론이 그것은 성경의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고안한 믿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인격적인 만남과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이론으로만 맞는 믿음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믿게 만드는 그리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게 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하고  굳어진 마음으로 그 가운데 머물게 하는 믿음 참 놀라운 고안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Shorts2   📺 그리고 고민거리였습니다. 말은 맞는데  성령의 역사가 없고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이 없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눈에 안보이고 인격적인 만남도 눈에 안보이고 변화시키는 능력도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맞는 말을 하고 처신을 그럴듯하게 하면 그것과 성경의 믿음과의 차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Shorts3   📺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행위와 분리되지 않기에  믿었으니 행하자가 아니라 믿으면 행한다는 것과 믿음만큼 행한다는 것과 믿음의 내용대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믿음은 가장 먼저 마음을 행복하게 변화시키고  자발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게 하며 내 손이 닿지 않는 환경을 변화시키고 약속에 근...

로마서로 보는 성도와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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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성인인 성도는 초등교사인 율법 아래 있지 않으므로 그 다스림과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그러하고 믿음의 분량을 따라 경험적으로 그러합니다(롬 6:14). 성도가 율법 아래서 율법의 음성을 듣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안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롬 8:13~15). 그리고 그가 아무리 성도가 되었더라도 율법 아래서는 항상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롬 3:9). 그러나 순전한 믿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 율법은 주인인 성도에게 정죄함 없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는 종의 역할을 하게 되고 성도는 그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행함으로 믿기 전에는 항상 실패했던 율법을 이루는 천상적 수준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롬 3:31). Shorts1   📺 그러나 성도가 믿음 안에서 성령을 따라 자책이나 책망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조차 율법의 행위를 기준으로 비추어서 본다면 모든 죄의 근원인 원죄가 있는 연약한 육신 가운데 살고 있는 현세에서는 항상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롬 3:20; 4:14~16). 그러므로 성도가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지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가 현재 아무리 경건한 성도일지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에는 항상 미달된 죄인으로 발견됩니다. YouTube   📺      Shorts2   📺

초대교회의 세 가지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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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마교회, 성도의 변화된 정체성에 대한 무지(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2. 고린도교회, 헌신의 원리와 가치에 대한 무지(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3. 히브리인의 교회,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무지(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YouTube   📺      Shorts   📺

로마서에 나타난 7차원의 구원(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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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음 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1) 신분의 변화 (롬 3:28) 2) 형벌의 면제 (롬 4:7) 3) 감정의 변화 (롬 5:2) 4) 생명의 변화 (롬 5:18) 5) 본성의 변화 (롬 6:2, 18) 6) 생활의 변화 (롬 8:4) 누림의 정도는 믿음의 분량에 따른 각자의 몫이지만 성도이면 이 모든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처음에 복음 을 믿을 때(롬 3:22) 성도에게 동시에 주어지며 다만 동시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상의 논리적 순서를 따라 한 가지씩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Shorts1   📺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을 풍성히 누리는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 주기 위해 세 가지의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후(롬 6:1, 15; 롬 7:1)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차원의 구원은 ‘몸의 변화(롬 8:23)’ 인데, 이것은 연약과 질병으로부터의 현세적 치유를 뛰어넘는 근본적인 변화이자 주님의 재림 때부터 누리게 되는 구원으로서, 죄가 거하는 지금의 죽을 몸이 죄가 없는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8:10~11). YouTube   📺      Shorts2   📺

율법과 신약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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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율법의 복과 저주는 신약성도에게 적용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계명 중 부모공경의 제 오계명이 여전히 유효함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엡 6:1~3). 그리고 창세기에서 선포하신 남녀의 질서가(창 3:16b), 교회 안에서 여전히 유효함도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4:34b).  다만 율법이 복이 되지 못한 것은 자기 힘으로 행하려고 했다는 것과 구원의 조건으로 행하려고 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렇게는 행할 수 없으므로 자기 힘으로 율법을 행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평생 율법의 정죄와 저주 아래 살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에 의한 죄사함을 단번에 믿어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칭의를 그 마음에 받은 사람은(롬 3:24), 내세의 영원한 형벌에서 완전히 면제되었고 구원받은 천국시민이 되었습니다(히 9:12).  Shorts1   📺 그리고 구원 받은 이후에도 언제든 복음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가져서 그리스도 안에 인격적으로 거함으로 현세의 모든 경험적 정죄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롬 8:1) 충만한 행복 가운데 성령을 따라 살므로 율법의 행위(요구)를 이루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롬 8:4). 그리고 이렇게 성령을 따라 율법을 이루는 삶을 사는 만큼 율법이 약속한 복과 상급이 현세와 내세에서 임하게 됩니다(참고-눅 18:30). 그러나 신약성도가 율법을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구약시대처럼 오래 참으시겠지만 또한 구약시대처럼 현세에서 엄한 징계까지 내리실 수 있고 내세에서 상급을 잃거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YouTube   📺      Shorts2   📺

신앙, 당위인가! 본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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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근본적으로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성도는 새 본성의 새 사람입니다. 현재 실제적이고 인격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여(요 15:4a 롬 8:1)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 성도에게(롬 8:4 갈 5:16) 무엇을 하라고 명하실 때 그것은 성도가 자기 본성을 거슬러 지켜야 하는 당위의 명령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자발적인 소원으로 충만한 새 본성의 성도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Shorts1   📺 명령을 갈등 가운데 행하는 당위로 이해한다면 아직 육신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거나, 만일 성도라면 자신의 정체성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으로 새 본성의 새 사람임을 말씀을 통해 아직 깨닫지 못한 영적인 이해력의 부족 가운데 있는 것이고 신앙을 세상의 도덕 수준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에 의한 새 생명의 능력이 아닌 자기 힘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계속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로마 성도들은 신앙이 근본적으로 당위의 차원이 아니라 본성의 차원에 속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신앙을 사람의 방식인 종과 상전 사이의 당위의 명령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롬 6:19; 참고-히 5:11). 그러면서도 본성의 차원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롬 6:22). Shorts2   📺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버지와의 분리와, 영벌의 정죄에 해당하는 저주의 잔을 받으시고자,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고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탄식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신의 생명의 본성(성결의 본성이 아닌)조차 부인하고 당위의 차원에서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기 위해 참된 갈등과 고뇌를 겪으신 역사상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고유한 사역을 영원히 이해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습니다. Shorts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