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언약과 새 언약의 피 뿌림이 가지는 의미

1. 옛 언약의 피 뿌림(출 24:6~8) 이것은 역사적으로 B.C. 1400년경에 아라비아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행위 율법 언약 때에 제단과 백성에게 뿌려진 번제와 화목제 희생짐승의 피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보편적 율법의 완전한 행위를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이 피는 시내산 언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생명을 상징하는데, 양 당사자가 언약을 각자의 생명으로 보증한다는 의미로 뿌려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편에서는 언약의 모든 내용을 항상 지킬 것이며 지키지 못할 때는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을 지키는 모든 백성에게 약속된 복을 반드시 내려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옛 언약의 보편적 도덕법을 모두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 진노에서 합법적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 단번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Shorts1   📺   2. 새 언약의 피 뿌림(마 26:27~28) 이것은 A.D. 33년경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형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입니다.  이 피는 모든 인류의 범죄를 대속하시는 피가 되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 뿌려져서(히 9:11~12; 12:24),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죄사함을 베풀어서, 사람과 화해를 이루게 하시는 피입니다. 그리고 이 피는 그 효력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서(히 10:22 벧전 1:2), 하나님의 영원한 속죄를 선언해 주며, 법적이고 실제적으로 죄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거듭남을 이루어 주고, 성령의 영원한 내주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두 언약에서 뿌려진 피의 공통점은 그 피...

창세기 3장 큐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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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담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는?(창 3:22) 범죄 이전에 아담은 선을 지식과 경험 모두로 알았고 악은 지식으로만 알았지만(창 2:9,17) 범죄 이후에는 거꾸로 선을 지식으로만 알게 되었고 악은 지식과 함께 경험으로까지 알게 되었습니다(창 3:22). 즉 범죄함으로 선의 본질은 알지 못하게 되었고 악의 본질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거나 경험하지 않으셔도 악의 본질을 알고 계시지만 사람은 범죄함을 통해 악의 본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은 전에 선을 경험으로 알았던 사람이 이제 거꾸로 죄를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그가 범죄하여 죄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Shorts1   📺 2. 아담이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는?(창 3:24) 그는 범죄함으로 법적이고 실제적으로 죄인이 되어 낙원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생명나무를 먹고 낙원에서 영생하는 일을 막기 위해 그를 추방하셨습니다. 그리고 낙원 밖에서 영생을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의 복음을 믿어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구원을 얻도록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YouTube   📺      Shorts2   📺  

그리스도와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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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고전 15:45)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지만 첫째 아담과 같은 육신이 되어 그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고난을 통해 그 아담이 세상에 불러들인 죄와 저주를 끝내셨다 는 점에서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2. 둘째 아담(사람)이신 그리스도(고전 15:47)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원죄가 없이 태어나셔서 첫째 아담이 세상에 불러들인 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셨다 는 점에서 둘째 아담이십니다.  YouTube   📺      Shorts   📺

성도의 사십 일 금식이 비성경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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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사십 일 금식이 명확하게 나온 곳은 제가 보기에 세 곳인데 모세가 시내산에 두 번째로 율법을 받으러 올라 갔을 때 먹을 것 뿐만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는 완전한 금식을 했다는 것과  엘리야가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호렙(시내)산까지 사십 일을 걸어갔다는 것과 주님께서 요단강 침례 후 광야에서 사십 일을 주리신 경우입니다. 이때는 물까지 마시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세 곳이나 사십 일 금식이 나오는데도 그것을 성도에게 적용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Shorts1   📺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금식한 경우로 보이고 자연적 원리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 주님의 금식은 메시야로서의 자기 입증을 위한 시험의 과정에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십 일 금식은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은 손쉬운 금식이 아니고 또한 자신을 메시야로 입증하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위의 세 가지 경우는 그런 금식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십 일 금식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간혹 듣는 사십 일을 금식했다는 분들의 말이 혹시 사실일지라도 과연 그 열매가 성경적일지 신중하게 의심할 것 같습니다. YouTube   📺      Shorts2   📺

로마서가 말하는 사망(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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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가 말하는 부정적 의미의 '사망'은 범죄한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그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받게 되는 하나님의 저주로서의 고통을 의미하며 이 저주의 고통은 몸과 영혼 모두로 받는 전인적인 것이지만 로마서에서는 주로 영혼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망의 고통은 각각 그 범죄의 분량을 따라 비례적으로 받으며, 현세와 내세에서 모두 받을 수 있고, 믿지 않는 자연인뿐만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사는 성도 역시 받을 수 있습니다. Shorts1   📺 자연인과 성도가 현세에서 공통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망의 고통으로는 그 범죄에 대한 율법의 정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과 수치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영혼의 목마름과 공허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에서 받는 사망으로는 자연인의 경우 복음을 믿어 죄 용서 받기를 거절하고 이생을 마침으로 지옥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형벌이 있고, 성도의 경우 성령께서 반복적으로 지적하시는 어떤 죄에 대해 끝내 회개하지 않고 이생을 마침으로 주님의 재림 때 받게 되는 불을 통과하는 것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고전 3:15). YouTube   📺      Shorts2   📺

성도의 두려움(경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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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사 11:2~3) 성도가 가져야 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이 두려움은 율법 아래서 가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 아래서 가지는 두려움입니다. 이상하지만 경험하는 사람은 인정하듯이 이 두려움의 열매는 신령한 기쁨, 가장 큰 기쁨과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두려움이기에  ➤ (주님께는 없지만)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 를 죽음보다 두려워하고 ➤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 끊어지는 것을 더욱 그러하고 ➤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 을 더욱 그러합니다. 이 두려움은 참된 지식과 지혜의 기초입니다(잠 1:7; 9:10). 이 두려움의 정상이 믿음의 정상입니다(창 22:12). 이 두려움은 예수님의 행복의 근원이었습니다(사 11:3). 이 복된 두려움의 충만을 구합니다. YouTube   📺      Shorts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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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1. 모든 열매의 근원이자 총합 - 사랑 2. 자신과 관련한 내적 열매 - 희락, 화평 3. 이웃과 관련한 실천적 열매 - 오래 참음, 자비, 양선(선량) 4. 하나님과 관련한 태도의 열매 - 충성, 온유, 절제 모든 열매는 질서를 따라 유기적인 ‘하나’(단수)를 이루고 있고 각각이 모두를 위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구분지을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강조점을 따라 이상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Shorts1   📺 여기서 첫번째 열매인 사랑은 행함 이전의 열매로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롬 5:5).  이어지는 나머지 열매는 그 사랑이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내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내 영혼에 희락과 화평을 가져다 주고  그 힘으로 이웃을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선량함으로 대하게 하되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태도 가운데 그렇게 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열매는 동시에 맺히는 것이지만 그 성장의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는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사랑의 기쁨이 없이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 절제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자의적 극기일 것입니다.  YouTube   📺      Shorts2   📺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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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처음 주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는 복음에 대한 나누어지지 않은 전심의 믿음을 가지게 되고 해방과 만족의 기쁨이 충만하고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정으로 즐거이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듭남의 체험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죄에 대한 패배와 영적 침체를 경험하며 다시 옛날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침체된 그의 믿음에는 구원을 의심하는 마음과 불안이 함께 합니다. 즉 처음 구원 얻을 때의 믿음보다 많이 작아졌고 약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처음 구원 얻은 믿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믿음이 있을지라도 구원은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신약성경의 많은 예를 보면 그럴지라도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눅 22:31~32 롬 14:22~23 고전 5:5 벧후 1:5~11 요일 3:18~20). 그는 여전히 구원 받은 사람이며 그 안에는 구원 얻는 믿음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Shorts1   📺 이를 통해 구원 얻는 믿음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분량과 또는 깨달음의 분량과 또는 확신의 분량과 또는 마음의 집중의 분량과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구원 받을 때의 뜨거운 믿음과 구원 얻는 믿음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내적 증언’ (롬 8:9, 16 요일 5:10)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마 7:23 요 10:27 고후 13:5)가 있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으로 유지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약해져서 감정이 식고 깨달음이 둔해지고 마음이 나누어져도 그 믿음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습니다(눅 22:31~32). 내쪽에서 간혹 사라진 것처럼 착각해도 그것은 착각일 뿐 여전히 성령의 내적 증언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의 끈은 경험적으로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Shorts2   📺 그러므로 여기서 구원 얻는 믿음의 두 가지 본질을 '성령의 내주로 인한 내적 증언'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처음...

믿음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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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항상 역동적으로 변합니다. 거시적으로는 그 수준에 있어서 성장해가고 미시적으로는 그 크기가 등락을 반복합니다.  믿음의 수준이 성장한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인 말씀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결과인 성령의 열매와 사역의 능력이 성장해간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크기가 변한다는 것은 이미 믿고 있는 말씀에 대한 믿는 순전함의 정도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은 그 수준이 항상 성장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퇴보하기도 하며 정체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체되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무생물적인 정체가 아니라 믿는 마음과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 사이의 힘의 균형에 의한 정체이므로 역동적인 정체입니다. Shorts1   📺 그리고 믿음의 이런 역동적인 특성은 무엇보다도 구원 얻는 믿음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이 그 수준에 있어서 성장할 뿐만 아니라 퇴보할 수 있고 그 크기에 있어서 커질 뿐만 아니라 작아질 수 있다고 할 때 그 퇴보와 작아짐은 그가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성도라면 구원을 잃을 정도까지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사실 믿음의 역동성에 대한 이상의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 중에 하나로서 기본적인 지식에 속하지만 의외로 믿음을 고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 방식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경에는 다른 사람의 믿음의 수준과 크기를 평가할 수 있는 명확한 말씀들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몇 가지 사항에 제한되며 각 사람의 믿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YouTube   📺      Shorts2   📺

로마서를 통해 보는 사도 바울의 영적 변화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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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에 의한 구원(롬 3:21~30)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먼 후 다메섹으로 이끌려가서 회개하고 아나니아의 전도와 안수를 통해 그 은혜를 믿어 죄 사함의 확신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며칠 동안 다메섹의 제자들과 교제합니다.(행 9:1~19 갈 1:13~16) 2. 이신칭의 교리의 확립(롬 4:1~5:11) 이후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가서 성령의 조명과 계시를 받아 구약성경 전체를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다시 검토하고 그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립합니다.(갈 1:17a) Shorts1   📺 3. 다메섹과 예루살렘 전도 죄 사함의 확신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전도하여 제자들을 얻은 후, 구원 받은지 3년이 되어갈 즘에 다메섹에서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여 바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를 가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에서도 열정적으로 전도하다가 또다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형제들에 의해 고향인 다소로 보내집니다.(행 9:20~31 갈 1:17b~24) Shorts2   📺 4. 신앙의 갈등기(롬 7:14~24) 다소로 돌아가서 대략 7~8년을 지내는 동안 처음에는 전과 같은 마음과 열정으로 전도하는 생활을 했지만, 그가 가진 구원의 원리가 이신칭의였던 것에 반해 경건과 사역의 원리는 여전히 율법과 자기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 내면에서 반복적으로 죄에게 패배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점점 더 강한 정죄를 받아, 결국 경건과 사역 모두에서 능력을 잃고 그 마음이 지속적으로 사망의 고통 가운데 거하면서, 성령의 불같은 내적인 역사가 소멸하고 사람 편에서 붙드는 구원의 확신이 약해지고 흔들리는 가운데, 자신의 섬기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절감합니다. Shorts3   📺 5. 신앙의 전환기(롬 6, 8, 12~15장) 갈등의 극한에서 마침내 십자가 대속의 복음 안에 있는 새 창조의 사역이 가져다 준 새 사람으로서의 참된 ...

성령의 충만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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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구하고 계십니까? 주님도 성령이 내려 충만하게 머무를 때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구할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삶에서의 행복도, 경건도, 사역도 없습니다. 성령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인격이시자 능력입니다.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존재이며 언어적 수사나 이론이 아닙니다. Shorts1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얻은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새롭게 부어주시고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흘러나오시는 성령의 충만입니다. 주님의 소원은 땅의 교회에 성령의 불을 던져 온 세상을 그 불로 타오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49~50)   YouTube   📺      Shorts2   📺

노예의지와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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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증언되는 율법에 대한 행함의 의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는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노예의지이지만 성령으로 증언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의 의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는 언제든 성공할 수 있는 자유의지입니다. Shorts1   📺 누구나 복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의해 법적으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본성적으로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실천적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는 신약성경, 특별히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포퓰리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 아니기에  모든 인류를 위한 진실한 포퓰리즘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했던 유대인들이 보기에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며 이 가르침을 받고 변화받아 기뻐하는 이방인들을 볼 때  시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서나 성도의 복되고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해결책은 이 단순한 십자가 대속의 복음입니다.   YouTube   📺      Shorts2   📺

죄에 대한 세 가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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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죄 값 범죄한 사람이 대가로 지불해야 할 값으로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그 범죄의 값으로 받아야 할 형벌 2) 그 형벌을 면제받기 위해 지불하는 속전 구약에서 속전은 범죄함으로 손해를 끼친 것과 '같은 종류와 가치'의 재물이나 그 값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이차적인 피해에 대한 배상까지를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물이나 돈으로 값을 수 없는 큰 죄는 자신의 생명으로 갚아야 했습니다. Shorts1   📺 성경은 모든 사람이 둘째 사망의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 영원한 형벌에서 건지실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가치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희생의 피를 흘려 자신의 생명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새 언약의 제사를 완성하시고 이제 그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단번에 얻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Shorts2   📺 2. 범죄 사람이 실제로 지은 죄 3. 원죄 원죄도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1) 아담이 지은 최초의 범죄 2) 그 최초의 죄를 짓게 한 사탄의 정신이자 세력과 원리, 그 최초의 범죄와 함께 아담 안에 들어왔고 그 후손에까지 유전되게 된 근원적인 죄, 모든 범죄의 한 원흉(다른 한 원흉은 우리 자신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되며 이런 의미의 원죄는 로마서에서 보통 정관사와 함께 단수로 사용됩니다. Shorts3   📺 4. 정리 전도자들이 강조하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 이제 믿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 성도는 법적으로 의인이다." 라는 표현들은 1번의 '죄 값'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도가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다거나 원죄가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즉 가장 근원적인 죄인 원죄는 여전히 성도 안에 있으며 실제적인 죄인 범죄는 여전히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엄밀한...